본문 바로가기

diary

지겹지만 버틴다. 삶은 거져 얻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글이란 무엇이냐. 글을 왜 읽냐. 책은 꼭 읽어야 되나. 그래야 세상을 살아갈 수 있나?
글을 쓰는 일이 음식 만드는 일보다 중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서가 우리를 독립시켰을까? 인과관계가 분명하지가 않다.
그럼 원자폭탄? 종지부를 찍었다는 점에서 자명하다.

작가 김훈이 TV에 나와 "제발 책 좀 읽으라고 하지마라. 필요하면 다 알아서 읽게 되어 있다"고
했다지. 그는 목수처럼 못질하지 못하는 것이 부끄럽지
자본론 각주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은 부끄럽지 않다고 했다.

'남한산성'의 도입은 말(言)이다.
조정의 말이 중국의 새로운 제국 청의 대군을 조선 땅으로 불러들였고,
서울을 버리고 강화로 가야 서울로 되돌아올 수 있다는 말을 불렀고,
결국 조선의 말보다 재빠른 청의 말(馬)이 길을 막자 어가를 남한산성으로 돌려
스스로 갇힐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말하고 있다.
언어에 대한 지극히 회의적인 시각을 맞딱뜨리게 된다.

하지만 '남한산성'에 갇혀버린 조정에게 말은 전보다 더욱 중요해졌다.
청과 싸워 이길 수 없었지만 싸움을 말해야 했고, 안에서 끝까지 말라야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모순된 언어의 세계에나 있을 법한 일이 실제하게 된다.
남한산성의 조정은 말라갈 수록 언어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백성들에게 환궁 후 갚겠다는 약속으로 곡식과 재물을 빌리고, 지방 관군을 부르는
임금의 격문을 전달하기 위해 목숨을 걸 사람이 필요했다.)

"삶 안에도 죽음이 있듯, 죽음 안에도 삶은 있다"('남한산성'의 김상헌)
"나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말할 때 세상의 더러움에 치가 떨렸고,
세상의 더러움을 말할 때는 세상의 아름다움이 아까워서 가슴 아팠다."('밥벌이의 지겨움')

김훈은 모순된 세상의 이치를 지겹도록 변주해 글을 써낸다.
더는 쓰지 않겠다고 말하면서 꾸역꾸역 쓴다.
"말로써 정의를 다툴 수 없고, 글로써 세상을 읽을 수 없"('남한산성' 작가의 말)다고 하면서도
그는 쓴다.
땅위로 뻗은 길 위를 걸어갈 수밖에 없듯이, 쓰는 것도 그러한 걸까.

왜? 그는 왜 쓰는가?

"세상의 길바닥에 있는 게 길이지요. 책 속에 길이 있다 하더라도 그 길이 세상의 길바닥과
연결되지 않으면 안되잖아요. 책 속에 있다는 길과 속세에 있는 땅바닥의 길을
어떻게 연결시켜 걸어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지식인의 과제이고, 고민이고, 고통인 것이죠.
책 속에 길이 있다면 매우 행복할 거에요. 책만 읽으면 될 테니까."
(교보문고 '사람과 책' 인터뷰에서 김훈)

그리고 그는 웃었다. 노년의 작가는 남한산성 같다.

남한산성
김훈 지음/학고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