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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ry

유통기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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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lowtry



말장난으로 만든 광고 카피가 많아서 그런 걸까(많다고 해놓고 또 예를 들자니 안 떠오르네, 보일락말락 아일락?), 가끔 포장지에서 엉뚱한 글자를 보고 다시 보면 착각인 경우들이 있다.

얼핏 본 포장지에서 '순수하고 눈맑은'이란 표현을 보고, 아니 '계란에 웬 눈?'인가 하며 다시 쳐다보니 '눈'은 온데간데 없다. 찰나에 불과한 짧은 시간 동안 '계란의 눈은 노른자인가?'라는 생각도 한 것 같다.
냉장고 문짝에 계란 포장지 따위를 붙여놓은 건 내 아내다. 유통기한에 민감한 건 나지만 잔소리에 능할 뿐이다. (사진을 위해 연출한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여러가지 공산품 품질표시 의무사항이 있지만 나의 세대에게 '유통기한'이 각별했던 적이 있다. 여기서 나의 세대란 김연수가 "나와 함께 뉴 트롤즈의 아다지오를 들으며 87년 대선을 투표권이 없는 눈으로 지켜보았고, '영웅본색', '개 같은 내 인생', '천국보다 낯설은'의 순으로 영화를 보았던 나의 세대에게 바친다"고 수상소감에서 밝힌 세대를 의미한다. 앞서 언급된 세 영화에 속하지는 않지만 왕가위 감독이 '중경삼림'에서 연출한 '유통기한' 씬으로 많은 남자들은 파인애플 유통기한을 확인하며 금성무가 된 것처럼 먹었다. 그러나 금성무처럼 밤을 새고 운동장 트랙을 뛴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모텔방에 술 취한 여자를 재워놓고 아무 일 없는 자신의 모습에서 그 배우를 떠올리기도 했을 거다.
그리고 감각적인 영화에 대한 감각은 점점 둔감해 졌고, 모호한 이론을 들고 다녀봤자 이해하지 못했지만 가끔 에코처럼 핸드폰을 비웃을 줄은 알았고, PCS가 나오자 통화품질은 좋지 않았지만 술 약속 잡기에는 그만이었다. 그리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친구가 가끔 문자를 보낸다.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는데." 라디오헤드의 크립을 들으며 역시 영웅본색과 나쁜피를 보았지만 "OK Computer"와 "Amnesiac"에 관심이 없고 그래도 화양연화와 2030은 다운받은 나의 세대와 나눌 소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