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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ry

'망치의 사랑'. 철/나무, 그리고 담배, 2007

Scene #1
   80년대 중반쯤이었을 것이다. 한 남자가 자신의 청혼을 거절하는 여인을 납치해 감금하고 그 몸에 문신을 새겨 넣은 사건이 있었다. 정확하게 기억할 수는 없지만 문신의 내용은 자신이 그 여자를 사랑하며 따라서 그녀는 자신의 것이라는 선언이었다. 아이들이 모자나 신발주머니 같은 것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제 물건에 이름을 써넣듯이 그는 여자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그 몸에 자기 이름을 써넣었다. 여기서 여자의 몸은 남자가 사랑하고 소유할 대상물이자 그 귀속관계를 명시한 문서 자체가 된다. 1인 2역. 신체가 글쓰기의 바탕으로, 텍스트의 가장 안전한 보관소이자 운반체가 되는 것이다. 이 사건의 괴기함은 피해자가 자기의 의사에 반反하여 자신을 지시하는 기호를 영구적으로 자기 몸으로 운반하게 되는 역설에서 생겨난다. 그가 이 사랑의 선언문을 분홍색 편지지나 뒷골목 담벼락에, 또는 여자의 집 대문에 써넣지 않고 여자의 몸에, 그리하여 여자의 일생 전체에 써넣었다는 사실, 그것이 충격적인 것이다.
(안규철의 책 "그 남자의 가방"의 150쪽 '문신'에서)

그 남자의 가방
안규철 지음/현대문학


Scene #2
  담배 안 피워요?
  네, 아직 못 배웠습니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꽤 그럴 듯한 겸양의 표현이라 생각하며 언젠가부터 쓰고 있는 말이다.
  그는 아랑곳 하지 않고
  잘 했어요. 담배 끝에 불을 붙이려 입을 오므리며 그가 말했다.
  내가 유일하게 후회하는 게, 이거 담배피는 거야. 공부 안 한거, 뭐 그런 게 후회되는 게 아니라.
  여의도의 한 햄버거 가게 테라스에 앉아 방이사라고 불리우는 사람이 이제 자기 이야기를 하려는 가 보다. 그의 사무실에서 만난 모이사(회계법인 이사라고 한다)는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댄 것 같고, 나를 방이사의 사무실로 데려간 김부장은 담배 한개피를 막 물려는 참이었다.
  여자 친구 때문에 피우게 됐거든.
  아, 참 담배 피우실 때마다 생각 나실테니...
  모두 웃는 표정을 지었다.
  김부장이 언제부터 피우시게 된 거냐고 물었다.
  나는 대학교 2학년 때까지 담배를 피워보질 않았거든.

  그는 대성학원에서 재수를 하면서 여자친구를 처음 만났다. 아니 보았다. 예뻤던지 그녀는 학원에서 유명했다. 화제의 대상이었고, 특히 많은 남자들이 사귀어 보고 싶다는 저희들끼리의 소망을 나누었고, 일부는 그녀 앞을 얼쩡거렸을 테고, 극소수가 소망을 그녀 앞에서 발설했을 것이다. 그도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그는 그녀를 멀리서 보기만 했다. 그래봤자(얼쩡거리는 재수생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제는 내 거다라고 생각하며.

  그의 얘기가 조금 황당했지만, 멀리서 바라만 보는 자는 대개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학력고사를 치기 전날 강의실을 나와 계단을 내려가는데 그녀가 뒤따라 나오며 그를 불렀다. 뭐라고 불렀을까, 이름? 저기요? 계단 위의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일 시험 잘 치세요. 네, 그쪽도요.
합격자 발표날 집으로 전화가 왔다. 그녀의 어머니였다. 법대에 합격한 그에게 그의 어머니는 축하한다고 말하며, 아직 논술 시험이 남은 딸의 공부를 좀 봐달라고 부탁했다.

고 한다. 그는 이후 생전 처음 보는 으리으리한 집이나 커다란 승용차, 멋진 요리를 경험해 보게 되었고, 대학 2학년 때 담배를 배우게 되었다. 여자친구는 술도 못마시고 담배도 못피우는 그에게 "너무 재미없다"며 소주 두병과 담배 한갑을 청했다고 한다.

  그분이 김변호사님인가요?
  회계법인 모이사가 물었다.
  아니, 그 친구하고는 금방 헤어졌죠. 그런데 담배는 못 끊겠더라고.
  흐읍이던가, 쉬익이던가, 그의 입에서 소리가 났다. 담배를 빨아들이는 건지 내뱉는 건지 알아차리기 어려운 건 내가 담배를 못 배웠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런데, 요즘 주변에서... 자꾸 김변호사랑 다시 합치라고 그러네. 그런데 원래 그 친구하고는 내가 안 맞아. 같이 있으면 서로 않좋아지는 걸 내가 아니까. 예전에 누구 결혼식장에서 같이 밥을 먹는데, 건너편에 앉아서 식사하시던 스님이 나한테 오더니 좀 따로 보자고 하시더니...
(slowtry의 발표하지 않은 "공상"의 '서울법대생에게 "너무 재미없다"며 소주 두병과 담배 한갑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