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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ry

그녀가 떠나고 나서야 알았네

존 콜트레인은 알고 또 좋아해도, 앨리스 콜트레인(Alice Coltrane)은 처음 알았다.
어제는 그녀가 세상을 떠난 날이었다.(69세. 2007-01-15)

앨리스는 존 콜트레인의 아내였다고 하는데, 아마도 나만 몰랐겠지만 재즈 피아니스트였다.
존의 사후 파라오 샌더스, 조 헨더슨, 아치 셰프 같은 나도 아는 인물들과 음악을 했다고 하니
나름대로 대단한 뮤지션이었던 것 같다. (재즈 저널들은 그녀를 오노 요코에 비유하기도 했다고)
예전에 '존 콜트레인 - 재즈, 인종차별, 그리고 저항'이라는 책을 감명 깊게 읽은 적이 있는데, 그 때도 앨리스라는 이름이 등장한 것 같지는 않다.

존 콜트레인
마틴 스미스 지음, 서찬석.이병준 옮김/책갈피

책을 읽고 써본 글이 있다. 서평도 아니고, 뭔지 모르겠다. 지금 보니...
제목은 '저항과 반역, 그리고 청년 재즈'였다.

‘너무 어려워서…’라며 겸손한 이유를 들곤 하지만 사실 재즈를 듣지 않는 사람들의 속 마음은 ‘내 취향은 아니야’가 아닐지. 10년 전의 민망한 차인표가 떠오르는 느끼한 색소폰 연주, 혹은 참을 수 없이 현란한 즉흥 연주는 가까이 하기엔 너무 멀다. 정말 한가하고 (경제적인) 여유 있는 자들만이 재즈에 관심을 갖고 있는 걸까? 재즈 역사 1백년, 나이를 잡수시긴 했다. 그도 청년 시절이 있었고, 그때는 록(rock) 못지 않은 반골이었다. 저항의 음악하면 록이나 힙합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최초의 영향력 있는 저항적 대중음악은 빌리 홀리데이가 노래했고 그건 재즈 보컬 음악의 고전 이었다.

“남부의 나무에는 이상한 열매가 열린다. 잎사귀와 뿌리에는 피가 흥건하고, 남부의 따뜻한 산들바람에 검은 몸뚱이들이 매달린 채 흔들린다. 포플러 나무에 열려 있는 이상한 열매들(Strange Fruit).” 은 반항하거나 도망치는 흑인 노예를 나무에 목매달았던 미국 백인들의 잔인한 관행을 묘사한 노래다. 가사는 유대계 백인 교사 아벨 미어러폴(Abel Meeropol)이 지었다. 나치의 유대인 탄압과 학살에 대한 노래이기도 할 것이다.

듀크 엘링턴, 카운트 베이시, 찰리 파커, 디지 길레스피 등 재즈의 거장들이 극심한 인종 차별 속에 재즈를 예술로 발전시켰다. ‘백인들이 무시하는 흑인들이 이처럼 훌륭한 예술을 창조한다’라는 선배들의 소극적인 의미의 저항은 1950년대 들어 적극적으로 변했다. 아트 블레키, 존 콜트레인, 맥스 로치, 소니 롤린스 등은 하드밥(hardbop)이라는 이름으로 차별에 반대하고 권리를 주장했다.

1950년대를 대표하는 재즈 스타일인 하드밥은 쿨(cool)보다 조금 늦게 등장해서 좀더 긴 생명력을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아니 어쩌면 프리 재즈나 퓨전 같은 이례적인 현상을 제외한다면 그 영향력은 현재까지 유효하다. 쿨 재즈가 비밥의 양식미를 차분하게 발전시켰다면 하드밥은 비밥의 좀더 직접적인 계승자라고 할 수 있다. 쿨이 클래식적인 편곡과 절제된 연주를 도입하면서 재즈를 세련화한 측면은 긍정적일 수도 있지만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특히 백인 연주자들 사이에서 유행한 쿨 재즈였기 때문에 흑인의 예술로서의 재즈의 위상에 상처를 입었다고 생각한 연주자들도 많았다. 쿨을 창조했다고 평가받는 마일스 데이비스도 곧 이 스타일에서 벗어난다. 또한 웨스트 코스트를 기반으로 활동한 쿨 재즈 연주자들은 근처의 할리우드 스튜디오에서 원하는 연주를 예술적인 각성 없이 제조하기도 했다. 하드밥은 1950년대 초반 재즈 예술가로서의 자부심과 흑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한 뮤지션들을 통해 출현하게 된다. 비밥의 뜨거운 솔로 연주법을 계승하면서 좀더 넓은 음계의 사용과 집단 즉흥 연주 등의 새로운 개념을 도입했다. 특히 가스펠, 소울, 훵크 등 흑인 문화의 정수를 재즈의 언어로 끌어들였는데, 이는 당시 시대의 현상과 사상을 반영한 것이었다. 재즈는 그리 한가로운 음악이 아니다.

지독한 반공주의를 앞세워 사회주의라고 의심되거나 반체제적인 사람들의 활동을 저지하려고 했던 (매카시즘의) 미국. 당시 흑인들의 권리 찾기 역시 가장 반미국적인 행동이었다. 버스에서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구타 당한 흑인 여성, 흑인에게 음식을 팔지 않는 백인 전용 레스토랑, 심지어 연주하러 들어가는 흑인 재즈 뮤지션 조차 뒷문으로 출입해야 했던 클럽도 있었다. 상상하기 어려운 인종 차별을 겪던 흑인들에게 마틴 루터 킹이 말하기 시작했고 말콤 엑스가 행동을 개시한 때가 바로 이 때였다. 재즈 뮤지션들은 흑인의 자긍심을 찾기 위해 뿌리 찾기에 나섰다. 아트 블레키는 하드밥을 일컬어 “뿌리찾기 운동”이라고 말했다. (흑인 고유의 것), (‘Nigeria’를 거꾸로 쓴 것), (해방을 위한 시간), (해방의 시간) 등 은유적이긴 했지만 모두 흑인의 긍지를 보여주는 곡들로 이 같은 음악은 57년과 62년 사이에 수백곡이 발표되었다. 소니 롤린스, 맥스 로치, 애비 링컨, 찰스 밍거스는 특히 정치적인 입장을 분명히 한 뮤지션들로 심한 탄압을 받았다. 애비 링컨은 「We Insist! Freedom Now Suite」을 녹음하고 10년간 단 한 차례의 레코딩 제의도 받지 못했다. 하지만 밥 딜런과 김민기와 마찬가지로, 퍼블릭 에너미와 투팍과 함께, 하드밥은 이 시대를 여전히 밝히고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