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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ry

그사람

호암상 뉴스레터를 만드는 회사일로
박완서 선생님을 뵙고 왔다.
나 같은 사람이 그분을 인터뷰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지만,
하라니까, 지나치게 마다하는 것도 월급 받는 입장에서 바람직하지 않으니...
5월 13일 선생이 계신 아치울로 갈 수밖에 없었다.

읽은 책이 친절한 복희씨밖에 없어 그 얘기만 해도 될까...
두려워 하며.


작가의 집은 아치울이라는 예쁜 이름의 마을에 있다. 인공적인 소리라곤 집짓는 인부의 망치질 소리뿐인 자연 속에 파묻힌 마을이 서울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근작 소설집 <친절한 복희씨> 수록 마지막 단편 그래도 헤피엔드의 배경이 서울 근교의 전원마을이기도 하다. 등단작 <나목>부터 가장 최근 작품까지, 어떤 작가보다 개인의 체험이 작품의 원동력이 된 이가 박완서일 것이다. 박경리 선생은 그런 문학적 후배에 대해 사람과 문학이 같다고 말했다. 작가의 문제는 어떻게 쓰느냐 이전에 어떻게 사느냐다, 박완서 문학은 스스로 그렇게 말한다.

사실 쓰는 것은 자신에게 격려가 되고 위안이 됩니다. 왜 작가 아니라도 일을 놓으면 금세 기력이 떨어진다고 하잖아요. 작가는 꼭 써야 할 무엇이 있다면 중병이 있더라도 그건 끝내겠다는, 그런 면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가까이 지낸 박경리 선생도 돌아가시기 전까지 만나면 뭘 쓰고 있다, 쓰고 싶다, 늘 그런 얘기를 하셨으니까요.

지난 해 호암상 수상자 이청준 작가를 비롯해 원로 작가들의 작품이 일제히 발표된 것을 기점으로 일종의 한국문학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박완서 작가의 <친절한 복희씨>도 한국소설 붐의 기폭제(인터뷰 중 선생께서 직접 쓴 표현이다)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기존 독자들이 아니라 대부분 새로운 독자, 젊은 독자들이라는 점에서 박완서 문학의 의의가 더욱 크다. 십 수년간 이어져온 한국문학의 위기론에 대한 대안이 일흔을 한참 넘긴 노작가에게서 발견된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 적지 않다. 작가는 젊은 독자, 새로운 독자를 만나기 위한 전략을 마련한 걸까?

연애경험은 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 떨림의 감정은 비슷하다고 봐요. 나는 리얼리즘 작가라고 생각해요. <그 남자의 집>은 제가 살았던 시대의 연애 이야기지요. 요즘 아이들의 연애의 장소, 소도구들에 대해 들어서 알더라도, 그걸 나이 든 사람의 입장에서 쓰는 것이지 요즘 아이들의 이야기는 아니죠. 요즘 내 작품의 주요 독자가 2, 30대라고 하는데, 그 것은 내 문장의 힘과 감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싱싱한 감수성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의 결과입니다. 사회 변화에 관심을 기울이고 현대 작가들을 읽고, 세계문학의 흐름과도 호흡을 같이 하며, 손자 손녀와도 대화하는 그런 내가 몸 담고 있는 현실세계에 관심과 애정을 늦추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노인네 얘기를 쓰더라도 진부하지 않은 문장을 써야 한다는 이야기지요.

박완서 작가의 감수성과 노력에 대한 자부심과 확신에 찬 어조는 후배 작가들을 위한 꾸지람처럼 단호했다.

2000년대 박완서 단편집이라고 할 수 있는 <친절한 복희씨>에 대해 작가는 내가 나를 웃기려고 쓴 작품들이라고 썼다. 그 이후 어떤 관심사로 어떤 글을 쓰고 있을까?

요즘은 <현대문학>에 매달 산문을 연재하고 있어요. 개인의 경험과 문학적 사유를 보태서 쓰는 글이에요. 이달에는 가장 충격으로 다가 온 일이 박경리 선생님 일이었으니까.

작가는 월간 <현대문학>에 지난 2나는 다만 바퀴 없는 이들의 편이다를 시작으로 에세이를 연재하고 있다. 불타 버린 남대문에 대한 안타까움, 일상에 대한 생각 등을 소재로 한 연재 에세이에서 우리는 돌아가신 박경리 선생님을 만나게 될 것 같다.

아치울로 박완서 작가를 찾아 오면서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친정 어머니 같았던 박경리 선생님을 잃고, 노작가가 장례 위원장이 되어 큰 일을 치르는 뉴스를 챙겨보며 인터뷰 자체가 욕심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걱정 끝에 막상 찾아 뵙자 자리에 앉히고는 물이라도 줘야 하는데에서 시작한 인심이 맥주, 와인까지 금세 늘어나신다. 마음이 녹자 코끝이 조금 찡해졌다. 단아한 미소와 인심을 지니신 작가는 사실 지금 이순간도 살아낸다는 표현을 마음으로 쓰고 계실 것이다. 글을 통해 여러 번 만났던, 굳이 산다가 아닌 살아낸다의 의미에 대해 여쭤보았다.

박경리 선생님은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살아낸다는 것 자체가 진리라고. 먹을 것이 없어서 하는 도둑질은 숙연하게 여겨야 한다고 생각해요. 하찮은 미물이지만 그 살아내는 모습을 보면, 그것 자체가 진리라는 생각밖에 안 들어요. 좋은 문학이란 살아내게 하는 힘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최소한의 자존감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게 합니다. 일시적인 오락과는 다른 것이지요. 종교는 무조건적인 복종을 요구하지만 문학은 저항입니다. 처음 영세를 받을 때 이제 글을 못쓰게 되면 어쩌나 하고 걱정도 했어요. 그러나 문학과 종교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삶을 반성하게 하는 기능이지요. 기도하듯 소설을 통해 삶의 이지러진 모습을 볼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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